렌즈로 보는 세상/시간을 걷다

이별 마져도 사랑하다.

돌파리 작가 2020. 9. 19. 10:32

“여보세요?”
“네, 여기는 ㅇㅇ이네 집입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
나이가 들어 보임직한 목소리의 남자 메시지가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하게 다가왔다.
내 사진 수강을 받던 아주머니는 2년 전에 남편이 돌아가시고 분명히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미 남자가 있다고 직감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스스로 결론 내리고 말았다. 
“그렇겠지, 홀로 살기에는 아직은 아까운 청춘이라고 생각하겠지."
며칠 후 강의실에서 수강생 아주머니를 만났다. 주책맞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대뜸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숙제 질문한 건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전화했는데 남자분의 메시지가 나와서 그냥 끊었습니다.”
“아…. 그 건.. 하늘나라에 있는 제 남편입니다..”
“네..? 뭐라고요? 돌아가신 남편의 메시지라고요?”
“네, 지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두고 있는 겁니다. 가끔 사람들이 깜짝 놀라긴 하지만 저는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저와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편안해져요.”
“아…”
그녀가 보고 있는 앞에서도 내 아래턱 입은 툭 떨어진 채 한 동안  닫지를 못 했다.
떠나신 지 2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아버지 메시지 녹음을 지우는 게 어떻겠냐고 아들의 권하지만  지우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의 단호한 심지에 순간 소름이 온몸에 일어섰다. 어느 미사여구의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을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폭탄을 맞은 듯한 충격은 며칠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내 잠자던 심장을 흔들어 댔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고사성어 하나가 문득  다가왔다.
"지고지순" 
 
유행가 가사처럼 “시간이 약”이라는 3류 철학은 묘하게 인생사와 와 잘 맞아떨어진다. 굳이 기억에서 밀어 내려하지 않아도 잊힐 것을 부질없이 붙잡지 말고 놓아줘야 할 때가 된 듯하다. 그래야 떠난 친구도 등을 보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 길을 떠날 것이다.
8월의 태양은 등판을 태울 듯이 쏟아지고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도시에는 역병만 미처 날뛴다.  돌아올 날자를 정하지 않고 딱히 어디로 갈 것인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바다가 있는 서쪽으로 달렸다.
끝 간데없는 수평선으로 태평양 바다와 얼굴을 맞댄  바닷가의 작은 포구가 나를 유혹했다. 밤새도록 창문을 두드리는 익숙하지 않은 파도소리와 폐부를 씻어내리는 비릿한 바다 냄새가 짓눌렸던 슬픔도 설움도 헹구어내는 듯하다.
포구의 아침 햇살은 선창에서 펄떡거리는 은빛 생선에 튕겨져 부서지고 갈매기의 합창은 힘차게 포구의 아침을 열었다. 문득, 살아 숨 쉬고 있음의 감사함이 격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먼 길을 달려온 밀물의 파도는 쉼 없이 육지를 밀어 올리고 세속에 오염된 내가 아니라, 세속을 오염시키는 내 자아를 꺼내서 썰물에 씻어 내야겠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더깽이가 씻겨지지 않으면 내 자아 안으로 끓임 없이 들락거리는 모순을 바닷물에 헹구어 보련다.
차가워야 되는 머리는 더워지고 더워져야 되는 가슴은 차가워지는 내 노쇠해져 가는 심신을 바다 한가운데 매어 두고 도망치고 싶다.
낯선 포구의 바닷가 뒷 산으로 별들이 소풍을 나왔다. 수억 만개의 별이 걸어간 긴 발자국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긴 족적을 남긴다.
언젠가 우리들이 남기고 떠날 이야기처럼 말이다. 
 
시간 위를 걷다.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무념무상의 시공에서
낯선 길을 걷는다.
사 계절을 돌고 돌아 걸어온 서해의 길 위로
늙은 해시계가 천천히 걸어갈 때마다
뭉텅뭉텅 기억을 베어가는 깊은 통증들... 
 
화살처럼 꽂힌 추억 하나 뽑아내자
발 밑에 그리움 한 덩어리 풀썩 주저앉는다.
지나온 길에 뿌려놓은 무수한 상념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 굽혀 주워
걸어가는 발자국마다 추억 하나 그리움 하나
가득히 담아 놓는다  

가끔 가슴이 시려올 땐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그래도 한기가 덥혀지지 않는 가슴을 안고
나는 지금 어떤 시간 위를 걷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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