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02

시간을 걷다

친구들과 철 없이 뛰어다니던 시절 세상을 노루처럼 달리던 청춘 운명이라며 죽자 살자 하던 사랑까지...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던 시간은 그 자리에 머무는 줄 알았다 시간이 무섭도록 냉정하다는 것을 시간을 다 걸어온 뒤에 알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가 걷는 것이라는 것도 시간을 다 걸어온 뒤에 알았다.

달에서 행복한 친구

아이들이 그려 놓은 낙서의 무게에 기울어진 담 벼락이 힘겹게 버티고 달이 머리에 닿는 산 동네에서 키 작은 내 고향 친구는 가난으로 허기를 채우며 산다 어둠을 흔들어 깨우는 재봉틀 소리는 가파른 골목길은 밤마다 돌아다니고 술 취한 친구의 혀 꼬부라진 노래에 누렁이가 짖으면 담장도 놀라서 비틀거린다 시골에서 이장네 밭 떼기를 부쳐 먹다 댐으로 수장된 고향 눈물로 채우고 홀 어머니를 치마 끈 잡고 따라와 금호동 산 꼭대기에 자리를 틀었는데 올 겨울 재개발로 또 다시 헐린다며 엄동설한 속의 아이들이 눈을 찌르고 쓰러진 소주병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친구야 이 넓은 땅에 내 가족 누울 땅 한 평 없으니 십 년 지기 달 친구가 넓은 땅 다 차지하고 달에서 함께 살잔다 친구의 혀 꼬부라진 노래가 담장을 밀던 밤 누렁이..

심연

뙤약 볕에 익은 나이를 등에 지고 허물어지는 노을 빛을 깍아 비탈진 서해 바다에 백만 갈래의 이랑을 일구고 백만 개의 씨앗을 뿌려 가슴으로 덮었다 해오름에 쌓아 올렸던 무지개 꿈은 파도처럼 함성을 지르며 일어섰지만 밀물은 육지의 등을 밀고 썰물은 큰 입 열어 꿈을 삼켰다. 정신없이 달려온 서해 바다에 그리움을 엮어 바다 길을 만들었지만 늙은 해시계가 천천히 걸어갈 때마다 뭉텅 뭉텅 기억을 베어가는 지독한 통증들... 가슴에 화살처럼 꽂힌 추억 하나 뽑아내자 바닥에 툭 떨어진 그리움 한 덩어리 파도가 달려와 덮썩 삼켰다.

나는 누구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단해진 아집과 편견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은 상처에도 크게 소란하며 몇 일이 지나도 아물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호르몬 분비가 헷갈려서 툭하면 슬퍼지고 눈물이 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무렇게나 흩어진 주름 사이로 그리움은 켜켜이 쌓여 더갱이가 지고 외로움은 날마다 깊어만 집니다. 뒤돌아보면 길도 없는 들판을 노루처럼 뛰어다니고 꿈은 우주를 날아다니던 청청하던 푸른 젊음이 엊그제였습니다. 숨차게 달려오다 잠시 추스리고 보니 어느새 내게 남은 나머지 날들은 살아온 날에 반에 반도 남지 않았습니다. 노인으로 가는 길목의 언덕에 앉아 돌아보며 내가 누구였는지 물어보지만 나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소 확 행

주방에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배추 된장국 보골 거리며 끓는 소리 애 엄마 딸과 수다 떠는 웃음소리 그리고 짜게 먹지 마라 달게 먹지 마라는 끝도 없는 잔소리 지지고 볶아서 귀에 딱지가 붙은 아내의 잔소리가 집 떠난 지 닷새 만에 그립다. 돌아 갈 집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축복인가